디자이너가 툴러로 죽지 않으려면


디자인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팔리기 위해 존재한다.

이 한 문장을 받아들이는 데 나는 몇 년이 걸렸다. 받아들이고 나니 업계가 다르게 보였다. 디자이너가 왜 자꾸 마케터 밑에 깔리는지, 왜 연차가 쌓여도 대우가 안 오르는지. 답은 단순했다. 우리는 큰 틀을 잡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느새 툴 다루는 손이 되어 있었다.

선로에서 갈라져 나가는 탈선기
탈선기. 열차를 일부러 선로 밖으로 밀어내는 장치다. 사고가 아니라, 안전장치다.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AI가 판을 갈아엎고 있다. HTML로 짜는 디자인, 이미지 생성, 프롬프트로 굴리는 시안 — 게임의 규칙이 바뀌는 중이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시도조차 싫어한다. “포토샵으로 디테일이 안 나오면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한다.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앗 뜨거” 하면서 빼지 않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빼라고 하면, 못 뺀다고 한다.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근 채 빼지 못하는 모습
빼라고 하면, 못 뺀다고 한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 손을 빼는 게 무서운 거다. 지금까지 갈고닦은 그 손기술이 아까운 거다. 여기까지 왔는데. 10년을 부었는데. 그래서 빤히 보면서도 같은 선로 위에 남는다.

아까워서 못 빼는 게 아니다. 아까운 걸 인정하면, 그게 전부였다는 걸 인정하는 거라서 못 빼는 거다.

깊이가 곧 함정이 된다

여기 잔인한 역설이 있다. 한 가지 툴을 깊게 판 사람일수록, 새 문이 안 보인다.

GPT가 처음 나왔을 때, 나보다 훨씬 똑똑한 명문대 출신들이 “별로네, 내가 쓰는 게 낫다”며 등을 돌렸다. 그들은 자기 전문성이 너무 단단해서, 그 틀 밖이 안 보였다. 나는 잃을 간판이 없어서 먼저 집어 들었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날은 속도가 됐다.

한 줄기 레일에 깊게 파인 홈
10년을 판 홈은 깊다. 자부심인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다.

포토샵만 깊게 판 디자이너도 똑같다. 그 깊이가 자부심인 동시에 감옥이다. 그리고 가장 아픈 건 — 그렇게 버티다 결국 툴러(tool operator) 가 된다는 거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냥 툴 쓸 줄 아는 사람. 세상에서 제일 툴러 취급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툴러가 되어간다.

그래서, 뭘 하라는 거냐

손기술을 버리라는 게 아니다. 손기술이 당신의 전부가 되지 않게 하라는 거다.

  • 도구가 아니라 “왜 팔리는가”를 붙잡아라. 그건 AI가 대신 못 한다.
  • 새 도구를 먼저 만져봐라. 잘하려고 말고, 그냥 만져봐라. 먼저 만진 사람이 흐름을 읽는다.
  • 당신의 진짜 자산은 포토샵 단축키가 아니라, 추상을 보이게 만드는 눈이다. 그 눈을 AI 위에 얹어라.

나는 당신을 끌어내리지 못한다. 손을 대신 빼줄 수도 없다. 다만 말할 수 있다 — 그 선로, 끝이 어딘지 나는 봤다.

내릴지는 당신 몫이다.